작열하는 태양 아래 모래까지 타들어갈 듯한 한여름의 오후. 한 대의 마차가 시골의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마차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지만 2인용으로 개조된 마차는 좁은 산길을 조금 빠른 속도로 달렸다. 한 마리의 말을 모는 것은 결코 지저분하거나 후줄근하지 않은 미와 기능, 두 가지 토끼를 한 방에 잡은 디자인의 편한 여행복을 입은 장신의 미남자다. 20대 초반의 가벼워 보이는 짧은 은발, 선명한 붉은색의 눈동자에 부드러운 얼굴선을 지닌 미형의 남자는 어딘가의 공주님을 에스코트해야할 듯한 외모로 지루한 얼굴을 해서는 턱을 괴고서 말을 몰고 있었다.
"아- 덥다."
가만히 중얼거렸다.
"10년 만의 더위일까.. 하아."
혼자서 한숨을 푹 쉬던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까딱했다. 남자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무언가가 관통해서 허공으로 날아갔다. 마차 안에서 튀어나와 마차 벽을 부수고 남자의 머리를 노린 것이다. 남자는 방금 살해당할 뻔한 것치고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계속 앞만 보고서 말했다.
"덥다니까-. 움직이게 하지 말아줘라. 마차 안에서 노닥거리는 주제에."
"누가 노닥거린다는 거야!"
불쾌지수 폭주다. 짜증 80% 농도의 말대답이 마차 안에서 터져나왔다. 남자는 단정한 얼굴을 구기더니 울컥해서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팔을 들어 팔꿈치로 부서진 마차 벽의 옆쪽을 쳐서 구멍을 크게 만들었다. 바로 반발이 이어나왔다.
"무슨 짓이야! 덥잖아!"
바람이 불어봤자 푹푹 익은 찜통의 연기다. 마차의 속도가 빠르다면 모를까 뛰는 것보다도 뒤쳐질 것 같은 느지막한 속도에서는 마차 안에 들어오는 바람은 마차 안을 상급 찜통화시켰다.
"토깽이! 이봐, 토깽!"
'토깽이'에서 '토깽'으로까지 불린 남자는 부른 소녀를 드디어 돌아보았다. 어이가 없어서 남자는 입을 딱 벌렸다. 이 더운 여름날에 혼자서 마차 안에서 뒹굴고 있으면 목이 드러나게 어깨를 조금 넘는 머리카락도 묶어버리고 스커트도 무릎정도까지는 걷어둬도 되지 않은가. 덥다고 짜증 만땅인 소녀는 꿋꿋하게 흑발을 찰랑이고 한 겹짜리 하늘하늘한 여름 드레스긴 하지만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땅에 닿을 듯한 긴 길이의 드레스를 그대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저래놓고 덥다고 짜증을 내다니, 그것도 땡볕 아래 마부 노릇하고 있는 자신에게!!
"리세아(licea). 더우면 반사작용이라도 보이지 그래? 머리를 묶든가, 드레스를 걷든가!"
"싫어."
"왜?"
땀은 거의 5분에 한 번씩 닦아내는 듯 땀은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만 보면 흑발에 금빛 눈동자를 지닌 정령과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우아한 귀족, 아니 황족과도 같은 미소녀는 입가를 뒤틀며 꽤 오랜 시간, 꽤 여러번 한 설명을 질리지도 않고 재방송했다. 리세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머리에 달린 하얀 리본과 투명한 느낌의 푸른 원석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가리켰다. 동그랗게 가공된 원석에 하얀 리본이 둘러싸고 그 리본은 하늘하늘하게 몇 가닥으로 떨어졌다.
"링크의 머리장식, 130루클."
리세아의 손가락은 자신의 가슴 사이, 아무 장식 없는 심플한 흰색 계통의 여름 드레스에 포인트가 되는 구슬 레이스 장식을 가리켰다.
"패러이즈의 드레스, 720루클."
애시당초 서민과는 동떨어진 외모에 분위기를 지닌 소녀다. 리세아의 입에서 나온 머리장식과 드레스의 가격이란 것은 서민이라면, 아니 어중간한 귀족이라도 거품 물고 쓰러질 가격이었다.
"명품이란 건 말야, 이름을 가진 물건이지. 그 이름만으로도 자존심 높은, 그런 거야."
"아-, 그런 거냐. 그럼 덥다고 하지를...! 우악!"
마차 급정거. 마차의 앞에 사람이 들이닥친 것이다. 아무리 느긋한 속도지만 말이다. 토깽이 남자는 고삐를 후다닥 잡아올려 말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마차에 아무 생각없이 앉아 더워더워 불평해대던 리세아는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벽에 머리를 박았다. 남자는 마부석에서 내려 마차 문을 열고 리세아를 확인했다.
"괜찮아?"
"그냥 머리만 박았을 뿐이야. 불량 마부역의 쓸모없는 토깽이."
더위에 마부 노릇하는 고생은 하나 알아주지 않고 폭언에 해당하는 불평만 해대는 리세아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들어서 다시 의자에 앉혀주며 남자도 불만을 표시했다.
"래빗(Rabbit)이라니까. 챙겨지는 타이밍이니 래빗으로 불러."
아마 실명은 래빗이었던 모양이다. 래빗의 불만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이 무시해버리고 손으로 말 앞에서 주저앉아 있는 인간을 가리켰다.
"저거나 확인해봐."
문을 열어둔 채로 래빗은 말 앞으로 가서 주저앉은 인간의 생사를 확인했다. 어차피 친 것도 아니고 말짱했다. 어딜 가나 튀는 래빗과 리세아와 달리 역시 평범한 인간이었다.
"안 다쳤어?"
초면의 첫마디에 반말. 어디까지나 래빗의 행각이다. 마차 안의 리세아는 저 건방진 토끼,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래빗은 그나마 동갑내기 예상이지만 리세아의 경우 한참 어린 외모면서도 별반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아, 네. 살아있군요.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그럼 됐어. 잘 가."
"네, 그럼."
남자가 뒤로 돌아서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뒤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검을 뽑을 것인가, 말 것인가."
청아하지만 소녀의 높은 자존심을 상징하듯 약간은 높은 톤의 목소리다. 남자는 걸음을 떼다 말고 다시 뒤로 돌았다. 래빗을 지나 마차 가까이 다가갔다. 래빗도 남자의 뒤를 따라 마차로 갔다. 물론 마부석에. 남자는 마차의 열린 문으로 리세아를 보았다. 리세아의 금빛 눈동자의 시선이 남자의 녹슨 검집에 곶혔다.
"이 검, 녹슬어서 빠지지 않습니다. 점쟁이시라면 조금 더 실력을 쌓으시는 편이 좋겠군요."
"점쟁이는 아니고, 그냥 이야기꾼(storyteller). 녹슨 거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리세아와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그 시선을 먼저 피한 건 남자 쪽이었다. 리세아는 생긋 웃고서 상체를 기울여 팔을 뻗어 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 사이로 남자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래빗, 출발해. 노숙하게 되면 밥 굶겨 죽일거야."
"그래, 그래."
말은 이번엔 조금 속도를 내어 길을 달렸다. 성의 없는 대답치고는 래빗의 표정은 살짝 어두웠다. 이미 해는 반쯤 진 상태고 정말 노숙하게 될 경우를 상상하자 래빗은 생각만으로도 미래에 먹구름이 꾸역꾸역 몰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마을에 도착하자 래빗과 리세아 둘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서서히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찬찬히 훑어본 마을은 살짝 폐허의 분위기까지 풍기는 흡사 유령마을이었다. 입술을 살짝 깨물고 리세아는 가방을 뒤져 가이드북을 꺼냈다. 피리어드 제국의 수도로 향하는 길은 유명하기 때문에 갖가지 루트에 따른 가이드북까지 시중에서 절찬 판매중이라 대충 골라잡아 하나 샀더니 완전 낚였다.
마을에서 쓸만한 집은 단 하나, 촌장의 집이라고 생각되는 2층짜리 나름 화려한 주택이었다. 리세아의 기준에선 별 셋 여관 수준이지만. 아마 저 집의 주인이 여행객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기 위해 출판사에 뇌물을 먹이고 가이드북의 루트에 이 마을을 실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이드북에 따라 여행한 여행자들은 멋지게 미끼를 덥석 물고 낚여 무지막지한 바가지에 허우적댄다. 집주인의 재산은 나날이 번창. 이게 리세아의 뇌가 이끌어낸 결론이다.
"저 여관 밖에 없네. 래빗, 저기로."
"바가지를 써줄 생각이야?"
"아니. 바가지를 씌울 생각이야."